연모 드라마 리뷰, 여성의 자아와 성역할을 넘은 궁중 로맨스의 재해석
KBS 드라마 ‘연모’는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쌍둥이 남매 중 오빠를 대신해 왕위에 오른 여성 이휘와 그녀를 보좌하는 정지운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한다. 성별과 권력을 넘나드는 이 작품은, 궁중 로맨스를 넘어 성역할 전복과 여성의 자아에 대한 통찰을 담아낸 독특한 서사로 주목받았다. 본 글에서는 드라마 ‘연모’ 속 인물 분석과 여성 주체성, 젠더 시선의 전환을 중심으로 이야기한다.
조선의 궁 안에서 펼쳐진 새로운 여성 서사
‘연모’는 조선시대라는 익숙한 시대적 배경을 통해 매우 낯선 이야기를 풀어간다. 왕이 된 여성, 그것도 누구도 몰라야만 하는 비밀을 품은 존재라는 설정은, 단지 자극적인 가상 시나리오가 아니다. 오히려 이 설정은 기존 사극이 보여주었던 성별 고정관념을 정면으로 뒤흔든다. 기존 사극의 여주인공들이 왕비나 궁녀의 역할에 한정되어 있던 데 반해, ‘연모’의 이휘는 중심 권력을 직접 쥐고 흔드는 존재다. 이것만으로도 이 드라마는 파격적이다. 쌍둥이 남매 중 아들이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살아남은 이휘는, 오빠의 죽음을 계기로 왕세자에 오르게 된다. 그녀는 본래 살아남을 수 없는 존재였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죽은 오빠의 정체를 대신하면서 살아남는다. 이는 단순히 ‘성별을 숨겼다’는 이야기 이상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이휘는 자신의 정체성과 감정을 억누르고, ‘왕’이라는 지위 속에서 완전히 다른 인생을 살아야 한다. 서사 초기부터 드러나는 이휘의 고독감은 단지 권력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여성으로 존재할 수 없는 자리’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매 순간 자신의 본모습을 감추며 살아가고, 그 과정에서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게 된다. 이 질문은 단지 캐릭터 하나의 고민이 아니라, 사회적 성역할에 대한 도전이자 질문이다. 이처럼 ‘연모’는 역사적 배경을 통해 현대적인 질문을 끌어낸다. 여성은 권력을 가질 수 있는가? 여성은 남성의 정체성을 차용해야만 사회 중심에 설 수 있는가? 이 질문은 시대를 초월하여 지금까지도 유효하며, ‘연모’는 이를 정제된 문법 속에서 담아낸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시청자는 단지 로맨스가 아닌, 존재에 대한 서사를 경험하게 된다.
이휘와 정지운, 관계의 전복과 감정의 진실
‘연모’의 중심에는 이휘와 정지운(로운 분)의 관계가 놓여 있다. 이휘는 신분상 왕이고, 정지운은 그의 서고담당 어의이다.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여성인 이휘가 남성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고, 정지운은 감정적으로 그녀에게 끌리면서도 ‘남성 왕’을 사랑한다는 혼란 속에 놓인다. 이 구조는 전통적인 성별 정체성과 감정 표현의 틀을 완전히 무너뜨린다. 드라마는 이 감정의 충돌을 무겁게 다루지 않으면서도 섬세하게 설계한다. 정지운은 왕이 된 이휘에게 점점 끌리면서도, 그 감정이 무엇인지 혼란스러워한다. 반면, 이휘는 정지운을 향한 감정을 자각하면서도 ‘왕’으로서의 역할 때문에 그 마음을 철저히 억누른다. 이들의 관계는 단지 로맨스가 아니라, 자기 감정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사회적 위치와 개인의 감정이 충돌할 때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에 대한 서사로 읽힌다. 특히 이휘는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도 끝까지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지 못하고, ‘왕’이라는 이름으로 존재하려 한다. 이 장면들은 여성으로서의 정체성, 권력자의 책무, 그리고 인간으로서의 진심 사이에서 갈등하는 인물의 복잡한 내면을 잘 보여준다. 결국 사랑은 감정을 완성시키는 수단이 아니라, 존재의 본질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기능한다. 정지운 또한 단순히 이휘의 상대역이 아니다. 그는 이휘가 ‘왕’이 아닌 ‘사람’으로 존재할 수 있도록 이끄는 유일한 인물이다. 즉, 정지운은 사랑의 대상이자 해방의 매개체이다. 이 점에서 ‘연모’는 전통적인 남녀 주도권의 구조를 전복한다. 여성이 권력을 쥐고, 남성이 감정의 기회를 제공하며, 그 안에서 진짜 관계가 형성된다. 이 관계는 단지 로맨틱한 전개로 끝나지 않는다. 이휘가 자신의 감정을 받아들이고, 결국 ‘진짜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도록 선택하는 과정은, 드라마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전환점이 된다. 이는 여성이 타인의 시선과 사회적 제약을 넘어 스스로를 인정하게 되는 성장 서사로 해석될 수 있다.
‘연모’가 남긴 질문, 그리고 여성 서사의 확장 가능성
‘연모’는 단순한 궁중 로맨스를 넘어, 여성의 존재와 자아를 어떻게 서사화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 드라마다. 왕이라는 지위에 오른 여성, 정체를 숨긴 채 살아가는 인물, 그리고 그 안에서 피어나는 사랑과 갈등. 이 드라마는 모든 장면마다 성별에 대한 고정관념을 질문하고, 새로운 관계의 형식을 제시한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점은, 이휘가 끝내 ‘자신’을 선택한다는 점이다. 그는 사랑을 얻기 위해 여성이 되지 않고, 여성이기 때문에 사랑을 포기하지도 않는다. 대신,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명확한 인식을 바탕으로, 권력과 감정의 균형을 찾는다. 이 선택은 단지 드라마 내 갈등 해소가 아니라, 현대 여성들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연모’는 또한 한국 사극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다. 단순히 역사적 사건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현대적 질문을 던지고, 사회적 담론을 녹여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기존의 사극이 구조적 틀 안에 갇혀 있었다면, ‘연모’는 그 틀을 부드럽게 깨뜨린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존재를 숨기지 않고, 감정을 억누르지 않고, 자신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 그것이 이휘가 보여준 ‘진짜 연모’였다. 결국 ‘연모’는 여성의 서사이면서, 모든 인간의 정체성 서사로도 확장될 수 있는 이야기다. 그리고 그 확장은 지금도 유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