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각본의 창작 구조와 작가의 세계관: 이야기의 뼈대를 만드는 보이지 않는 손

드라마는 배우의 연기, 연출자의 감각, 촬영과 음악의 조화로 완성되지만, 그 시작점은 언제나 ‘각본’이다. 드라마의 모든 사건, 대사, 감정의 흐름은 결국 한 명 혹은 몇 명의 작가가 써내려간 문장들에서 비롯된다. 특히 각본은 단순한 줄거리 구성이 아니라, 세계관을 구축하고, 인물의 심리를 설계하며, 사건의 시간적 배치를 조절하는 고난이도의 창작 행위다. 본 글에서는 드라마 각본이 어떤 방식으로 서사를 설계하고, 작가 고유의 세계관을 어떻게 반영하는지 분석하며, 각본이라는 ‘보이지 않는 설계자’의 역할을 조명해본다.

무대 위에 떠 있는 거대한 대본 책이 펼쳐져 있고, 그 위에서 만년필이 서사 구조를 그리며 움직이고 있는 모습. 붉은 벨벳 커튼이 배경에 드리워져 있고, 따뜻한 황금빛 조명과 차가운 푸른 그림자가 대비를 이루며 연출의 감각을 더한다

서사의 설계도: 기-승-전-결을 넘어선 구조적 전략

전통적으로 드라마 각본은 4막 구조를 기반으로 작성되며, 도입-전개-위기-절정-결말이라는 서사 흐름을 따라간다. 그러나 최근의 드라마 각본은 단순한 순차적 전개를 넘어, 플래시백, 병렬 서사, 다층적 시점 구조 등 다양한 내러티브 기법을 활용하며 서사의 밀도를 높이고 있다. 예를 들어, SBS의 《펜트하우스》(2020~2021)는 전형적인 복수극과 멜로드라마의 공식을 따르면서도, 각본에서 다층적 인물 관계와 파격적인 회차별 반전을 끊임없이 배치하여, 시청자의 예측을 무너뜨리는 구성 전략을 구사했다. 특히 회차 말미에 삽입된 ‘클리프행어’ 기법은 다음 회차로의 몰입을 유도하며, 각본의 구조적 역량을 극대화시킨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한편, 일본 드라마 《언내추럴》(TBS, 2018)은 에피소드형 구성임에도 불구하고, 시즌 전체를 아우르는 메인 플롯을 교묘히 삽입한다. 각 에피소드는 독립적인 사망 사건을 다루지만, 작가는 그 사건들 속에 메인 인물의 과거와 연결된 단서를 숨겨 놓고, 이를 통해 긴장과 정서적 궁금증을 유지한다. 이러한 구조는 단순히 회차 단위의 플롯이 아닌, ‘시즌 단위의 각본 설계도’가 얼마나 정교하게 설계되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또한, 최근 각본은 ‘시청자의 추론 욕구’를 자극하는 구조로 진화하고 있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더 글로리》(2022)는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복수 서사를 구성하면서, 인물의 대사를 통해 퍼즐 조각처럼 단서를 제시하고, 시청자로 하여금 인과 관계를 능동적으로 추론하게 만든다. 이런 방식은 각본이 단순히 정보를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시청자와의 게임’을 설계하는 고도의 전략이라는 사실을 증명한다. 따라서 오늘날 드라마 각본은 단지 이야기를 전달하는 기능이 아니라, 사건과 감정, 정보와 정서를 균형 있게 배치하여 시청자의 몰입을 유도하는 ‘정교한 설계 문서’라고 할 수 있다.

인물과 세계관의 구축: 작가의 정신이 서사에 깃드는 방식

각본은 단순한 이야기의 구성이 아니라, 작가의 세계관을 구현하는 가장 본질적인 장치다. 작가는 인물의 대사와 선택, 행동을 통해 삶과 사회, 인간관계에 대한 자신의 철학을 표현하며, 이러한 세계관은 종종 드라마의 장르를 초월한 정서를 형성한다. 예를 들어, 김은희 작가의 작품 세계는 ‘권력’과 ‘기억’을 중심으로 한다. 《시그널》(tvN, 2016)과 《킹덤》(Netflix, 2019~) 모두 장르적으로는 각각 범죄 수사극과 좀비 사극이지만, 공통적으로 ‘과거의 진실을 밝혀 현재를 바꾸려는 시도’라는 주제를 공유한다. 이는 작가가 가진 ‘시간’에 대한 철학과 ‘진실은 반드시 밝혀져야 한다’는 윤리 의식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세계관의 반영이다. 또 다른 예시로, 박해영 작가의 《나의 아저씨》(tvN, 2018)는 인물 하나하나의 정서와 내면에 천착한 대사 중심의 각본이 돋보인다. 이 드라마의 세계관은 차가운 현실 속에서도 인간이 인간에게 따뜻해질 수 있다는 믿음에서 출발하며, 작가는 이를 복잡한 사건보다는 반복되는 일상과 무심한 배려의 장면들을 통해 설득력 있게 풀어낸다. 작가의 가치관은 대사에 스며들고, 그 대사는 곧 세계관이 되어 드라마 전반을 이끈다. 세계관은 인물 설계를 통해 더욱 구체화된다. 《괴물》(JTBC, 2021)은 두 형사의 심리 변화를 중심으로 전개되며, 작가는 선과 악의 경계를 명확히 나누지 않는다. 이는 인간의 이중성, 정의의 상대성이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등장인물들의 선택과 행동을 통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다. 세계관은 곧 윤리적 구조이며, 각본은 그 구조 안에서 인물의 감정을 정교하게 설계한다. 결과적으로, 드라마 각본은 단순한 사건의 나열이 아닌, 작가 개인의 세계를 구성하고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을 서사 안에 투사하는 도구다. 시청자는 인물의 말을 따라가면서도, 사실은 작가의 목소리를 듣고 있는 셈이다.

시대성과 확장성: 플랫폼에 따라 진화하는 각본의 형태

현대의 드라마 각본은 더 이상 ‘TV 드라마’만을 대상으로 하지 않는다. 다양한 플랫폼, 특히 OTT 서비스와 웹 기반 콘텐츠가 확장되면서, 작가는 각본의 구조와 문법을 플랫폼에 맞춰 재설계해야 하는 새로운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이 변화는 이야기의 밀도뿐 아니라 속도, 에피소드 분량, 시청자의 피로도까지 고려한 ‘새로운 글쓰기 전략’을 요구한다. 넷플릭스의 《인간수업》(2020)은 전통적인 16부작 드라마가 아닌, 10부작 구조를 통해 한정된 시간 안에 빠른 몰입과 높은 정보 밀도를 유지한다. 이 각본은 회차별 클라이맥스를 명확히 설계하면서도, 인물의 심리 변화가 선형적으로 진행되지 않고, 뒤틀리고 겹쳐지며 긴장감을 유지한다. OTT의 시청 환경이 ‘한 번에 몰아보기(Binge-watching)’에 최적화되어 있기 때문에, 작가는 각 회차마다 유입과 이탈의 지점을 치밀하게 설계해야 한다. 또한, 유튜브 기반 웹드라마 《한 사람만을 위한 사랑》(2022)은 댓글 피드백과 실시간 반응을 바탕으로 일부 회차의 구성이나 인물의 분량이 조정되기도 했다. 이는 기존 방송국 중심의 폐쇄적 각본 구조와 달리, 실시간 소비와 피드백 기반의 유연한 서사 설계가 가능해졌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작가는 더 이상 단독 창작자가 아니라, 시청자와의 대화 속에서 서사를 조율하는 협업자이기도 하다. 해외에서는 앤서니 홉킨스가 출연한 HBO의 《웨스트월드》(2016~)가 주목된다. 이 시리즈는 시즌이 거듭될수록 각본이 복잡해지고, 인공지능과 자유의지, 시뮬레이션 현실 등 철학적 주제를 심화시킨다. 각본은 단순한 이야기 전달이 아니라, 시청자에게 철학적 사고를 유도하는 장치로 기능하며, 이는 ‘플랫폼 드라마’가 고차원적 서사를 가능하게 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변화다. 결국 현대의 각본가는 이야기뿐 아니라, ‘어디에서 소비될 것인가’, ‘누가 소비할 것인가’를 함께 고려하는 전략가가 되어야 한다. 각본은 더 이상 종이 위의 글이 아니라, 플랫폼과 시대가 요구하는 감각적이고 구조적인 콘텐츠 설계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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