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죄 실화극의 윤리성과 연출 기법: 진실을 다루는 드라마의 무게

범죄 실화극은 실존했던 사건이나 인물의 이야기를 극적으로 재구성한 콘텐츠로, 팩션(faction)이라는 새로운 장르로 불리기도 한다. 이 장르가 지닌 강점은 명확하다. ‘실제 일어났던 일’이라는 전제가 주는 몰입감은 다른 어떤 드라마보다 강력하며, 사건을 둘러싼 윤리적·사회적 질문은 시청자에게 단순한 감정 소모 이상의 경험을 제공한다. 하지만 동시에, 범죄 실화극은 극적인 흥미를 쫓는 순간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로 이어질 수 있는 높은 윤리적 긴장 위에 서 있는 장르다. 본문에서는 최신 범죄 실화극들을 중심으로 이 장르가 지켜야 할 윤리적 태도와 구체적인 연출 기법을 분석해본다.

범죄 실화극의 긴장감과 윤리적 딜레마를 시사하는 무드 있는 장면으로, 카메라와 사건 파일, 그림자가 드리워진 인물이 대비되어 드라마틱한 느낌

피해자를 중심에 두는 시선: '누구의 이야기'를 말하는가

범죄 실화극이 가장 먼저 고민해야 할 것은 “이 이야기를 누구의 시선으로, 왜 다루는가”라는 물음이다. 단순히 사건의 충격성을 부각하거나, 범인의 심리를 흥미 위주로 소비하는 태도는 매우 위험하다. 피해자와 유족의 고통은 여전히 현실에 존재하고 있으며, 잘못된 재현은 기억을 왜곡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넷플릭스의 《When They See Us》(2019)는 1989년 미국 센트럴 파크 파이브 사건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실화극이다. 이 작품은 억울하게 범죄자로 몰린 흑인 청소년들의 시선으로 이야기를 이끈다. 드라마는 단순히 재판과정을 나열하지 않는다. 대신 각 소년의 가족, 사회적 배경, 수사과정에서의 부당함을 깊이 조명하며, 피해자와 가해자의 경계가 어떻게 오도되었는지를 설득력 있게 전달한다. 특히 이 드라마는 경찰의 강압 수사와 언론 보도의 편향성, 법 시스템의 구조적 차별을 꼼꼼히 보여주며 사회 시스템을 비판적으로 조명하는 데 성공했다. 한국에서도 이러한 태도를 반영한 사례가 등장하고 있다. 쿠팡플레이의 《어느 날》(2021)은 영국 원작 를 리메이크한 작품이지만, 피해자와 가해자, 그리고 법적 판단의 흐릿한 경계를 사실적으로 풀어낸다. 이 드라마는 ‘누가 진짜 피해자인가’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며, 시청자가 윤리적으로 고민하게 만든다. 중요한 점은, 이러한 실화극이 ‘가해자 중심’의 극적 재미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피해자 혹은 억울한 이들의 삶을 중심에 두며 시청자에게 감정적 공감대를 쌓게 해야 한다는 점이다. 단순한 “사건 재현”이 아닌 “삶의 재현”으로 접근하는 태도가 실화극이 지녀야 할 가장 본질적인 윤리다.

사실과 극적 구성의 경계: 각색은 설득의 기술이어야 한다

실화극은 반드시 ‘극적 각색’이라는 과정을 거친다. 아무리 사실이라 하더라도 드라마로 구성되기 위해서는 시간과 인물, 사건의 배열이 재조정되어야 한다. 이때 가장 중요한 것은 '사실을 훼손하지 않되, 이야기로 설득하는 기술'이다. 영국 드라마 《The Pembrokeshire Murders》(ITV, 2021)는 1980년대 발생한 미제 살인사건을 재수사해 진범을 밝혀낸 경찰의 기록을 바탕으로 한다. 이 드라마는 실제 수사기록과 인터뷰를 기반으로 하되, 감정선과 플롯 전개는 극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건 그 자체보다 수사팀의 좌절과 인내, 의심과 결단의 순간에 초점을 맞추며, 시청자가 사건의 전개보다 사람의 심리에 몰입하게 만든다. 이처럼 각색은 사실 위에 감정을 덧입히는 작업이지, 사실을 가리는 방식이어선 안 된다. 또한, JTBC의 《언더커버》(2021)는 실제 공작원의 삶에서 모티프를 얻었지만, 드라마적 긴장감은 가족과 신념 사이에서의 충돌에서 비롯된다. 현실의 틀 위에 허구적 인물을 세워 교차시킨 이 드라마는, ‘실제 있었던 일처럼 보이는 이야기’를 만드는 데 성공한 사례다. 실화극이 시청자의 공감을 얻으려면, 시청자가 알아차릴 수 없는 ‘사실과 허구의 접착점’이 필요하다. 너무 현실을 따르다 보면 지루해지고, 과도한 각색은 왜곡으로 이어진다. 따라서 각색은 단순한 창작이 아닌 설계의 기술이며, 그 기술은 반드시 사건의 본질을 지키는 윤리 위에서 작동해야 한다.

감정의 연출과 몰입: 진실을 말하는 방식의 문제

범죄 실화극은 진실을 말하는 장르다. 그러나 그 ‘진실’이 시청자의 가슴에 닿기 위해서는, 효과적인 연출 장치와 정서적 설계가 반드시 병행되어야 한다. 단순한 정보 전달이 아닌, 감정의 파동을 전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예를 들어 《The Night Of》(HBO, 2016)는 젊은 남성이 살인사건의 피의자로 몰리며 벌어지는 사법 과정을 그린다. 이 드라마는 극적인 사건보다 ‘사소한 감정’을 연출하는 데 집중한다. 피의자의 눈빛 변화, 변호사의 손의 떨림, 교도소 내의 작은 충돌 하나하나에 카메라는 천천히 머문다. 대사보다는 침묵, 음악보다는 정적을 활용해 감정을 표현하는 방식은 실화극이 ‘사실처럼 느껴지게’ 만드는 연출의 정수다. 한국 드라마 《괴물》(JTBC, 2021) 또한 비슷한 결을 따른다. 이 작품은 연쇄살인을 배경으로 하지만, 그것을 둘러싼 인물들의 심리, 과거의 트라우마, 경찰 조직 내부의 균열을 서서히 조명한다. 연출은 직접적인 묘사를 자제하고, 사건의 충격보다 인간의 붕괴에 초점을 맞춘다. 이런 절제는 실화극에서 매우 중요한 미학이다. 지나치게 폭력적이거나 자극적인 묘사는 오히려 몰입을 해치고, 윤리적 논란을 유발할 수 있다. 음악과 색채, 카메라의 움직임까지 모두 ‘감정을 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어야 한다. 특히 실화극에서는 시청자에게 강렬한 감정을 던지기보다는, 서서히 감정을 이식하듯 전달하는 방식이 더 큰 울림을 준다. 그리고 그 감정의 진폭이 클수록, 우리는 현실의 진실을 더 또렷이 바라볼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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